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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마음 - 부모이니 미련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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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유럽, 아시아, 태평양 순회 강연 중 마지막 강연이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필리핀 J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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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발달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아이가 발달 장애를 갖고 있어 고민입니다. 아이의 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발달 장애는 아닐 것이다’라고 얘기해주는 사람도 있고, 한편으로는 ‘받아들여라’, ‘내려놓아라’라고 얘기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내려놓는 것도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하루는 천당을 갔다가 하루는 지옥을 갔다가 왔다 갔다 합니다.”

“아이가 몇 살이에요?”

“6살입니다.”

“어떤 장애예요?”

“발달 장애입니다.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보니 ‘경계’에 있다고 합니다. 아직 더 지켜봐야 된다고 하는데, 저는 하루하루가 얼음길을 걷는 느낌입니다.”

“자기가 얼음길을 걷는다는 것은, 아이의 발달 장애가 완전한 장애로 확립될까 봐 겁이 난다는 것 아니에요?”

“전문가가 아직은 아니라고 했는데, 정말로 장애로 판명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제가 아이와 하고 싶었던 일들이 많았는데, 그것도 못할 수 있고요.”

“질문자는 아이가 장애를 가졌는데, 지금 자기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고 있나요?”

“아니요…”

“부모라면 장애를 가진 아이가 어떻게 하면 이런 장애가 있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궁리해야지요. 장애가 없는 정상적인 아이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무엇을 같이 할 것인지 계획했는데, 그게 지금 안 맞아서 고민하고 있다면, 질문자는 부모 자격이 없습니다.”

“그건 아니고요.”

“고민이 될 게 뭐가 있어요? 지금 발달 장애의 경계 지점에 있다면, 완전히 장애라고 판정된 것보다는 좋은 조건이에요, 안 좋은 조건이에요?”

“좋은 조건입니다.”

“그런데 왜 고민이에요? 완전히 장애라고 판정이 나도 그 아이는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없어요?”

“당연히 있습니다.”

“장애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이는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이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가 행복할 수 있을까?’

검사를 했더니 장애가 덜 있거나 장애가 없다면 잘 된 일이잖아요. 그래서 장애가 있다는 전제를 하고 계획을 세우면 돼요. 그러면 아무런 뒤탈이 없어요.”

“장애가 있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장애가 있다고 행복한 게 아니라, 장애가 있는 아이라 하더라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건 인정해요?”

“네.”

“아이가 장애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장애가 있더라도 우리 아이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나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런 마음을 갖고 계획을 세우면 됩니다.”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많은 얘기를 들었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은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 말은 ‘아이에게 장애가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미련을 못 버려서 생기는 거예요.”

“부모이기 때문에 미련을 못 버리는 것 같아요.”

“부모이기 때문에 미련을 못 버리는 것이 아니에요. 부모이기 때문에 오히려 미련을 버려야죠. 부모가 아니기 때문에 미련을 못 버리는 겁니다. 부모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가 장애를 갖게 되면 나는 어떡하지…’ 이런 걱정을 하게 되는 거예요. 진짜 부모라면 아이가 얼굴이 검든, 아이가 눈이 안 보이든, 아이가 장애가 있든, 그런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가 어떤 장애를 갖더라도 나는 너를 보살핀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질문자는 부모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고민이에요.”

“어떻게 하면 부모의 마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냥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 됩니다. 아이의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사랑하면 돼요. 만약 아이가 눈이 안 보인다면, 부모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점자를 배울 수 있게 도와주면 됩니다. 귀가 안 들리는 아이라면, 수화를 배우게 도와주면 됩니다. 다리를 못 쓰는 아이라면, 휠체어를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됩니다. ‘아이의 지금 상태에서 내가 무엇을 보완해 줄 수 있을까?’ 이런 관점을 가지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말씀은 알겠는데, 사람인지라…”

“사람인지라가 아니지요. 그렇게 하기가 귀찮은 거죠.”

“귀찮은 건 아니에요.”

“귀찮은 거예요. 솔직하게 얘기해 봐요. ‘애 하나 키우기도 힘든데 거기다 애가 눈까지 안 보이고 귀까지 안 들리는데 어떡하나’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장애가 있어서 다른 사람들한테 창피하게 생각하고, 일 많은 거 생각하고, 돈 들 거 생각하고, 나 못 놀 거 생각하고. 전부 자기 입장 생각하니까 힘들지요.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면 힘들게 뭐가 있어요. 나처럼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직설적으로 이렇게 확 까뒤집어서 얘기해주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건 진짜 최고이신 거 같아요. 다른 분들한테 들어본 적이 없는 얘기를 하시네요”(웃음).

“다 자기 욕심 때문에 힘든 거예요. 아이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요. 내가 돌보는 것이 아이에게 더 나을 때는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아이를 돌봐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아이에게 정을 끊기 어려워도, 전문가가 아이를 돌보는 것이 아이에게 더 낫다면 가슴이 에이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를 전문가에게 보내야 합니다. 이게 부모예요. 부모란 ‘내가 어떻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돼요. ‘아이에게 어떤 게 좋으냐’ 이거만 딱 생각해야 해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은 부분이 있다면 아이를 전문가에게 맡겨야 되고, 의사에게 맡기는 게 좋은 부분이 있다면 의사에게 맡겨야 하고요. 나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내가 아무리 힘들고 다른 모든 욕망을 다 포기해야 하더라도 아이를 돌봐야 해요.

아이를 중심에 놓고 사물을 봐야 부모라는 거예요. 질문자는 나를 중심에 놓고 보고 있어요. 질문자 얘기를 들어보면 ‘내가 이런 계획을 세웠는데 저걸 하려면 이게 힘들고, 이걸 하려면 저게 힘들다.’라고 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애 생각했다, 내 생각했다, 애 생각했다, 내 생각했다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질문자가 천당 갔다 지옥 갔다 하는 거지요.

‘나는 딱 아이만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가슴 아픈 일도 한다.’

이렇게 딱 정해버리면 아무 문제없어요. 아이가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장애가 있으면 장애가 있는 대로 아이의 상태에 따라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관점을 이렇게 잡으면 좋지요. 그러면 아무 걱정거리가 없어요.

자기 계획이 있으니까 걱정거리가 생기는 거예요. 아이의 눈이 안 보이면 안 보이는 걸 인정을 해야 되는데, 내 욕망으로 인정을 못합니다. 눈이 안 보이는데 눈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애를 때리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면 어떻게 하겠어요. 치료를 해도 안 되니까 나도 지치고 아이에게도 열등감이 생기잖아요. 그럴 때는 전문가에게 딱 맡겨서 의사가 ‘이거는 안 된다’ 하면 안 되는 줄 받아들여야 돼요. 그런데 부모는 욕망 때문에 전문가 말도 안 듣고 이 병원 저 병원 자꾸 끌고 다니잖아요. 그럴수록 아이는 열등의식이 생긴다는 거예요. 아이가 눈이 안 보여서 불평을 해도 ‘괜찮아. 눈이 안 보이는 건 좀 불편한 건 맞아. 그렇다고 네가 부족한 건 아니야’ 이렇게 격려를 해줘야지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호주에 두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몸만 있는 닉 부이치치라는 사람을 압니까?”

“네.”

“그 사람 얼마나 밝습니까. 세계에 웃음을 선사하고 다니잖아요. 대부분의 부모가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으면 ‘아이고 하느님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하거나,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애를 낳았나’라고 합니다. 장애를 벌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게 인권 침해예요. 장애는 그냥 장애일 뿐이에요. 즉 불편할 뿐이에요.

그런데 닉 부이치치의 부모는 이렇게 받아들였죠. ‘아, 이 아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다. 만약에 이 아이가 다른 집에 태어났으면 사랑받지 못했을 거 아니냐’ 이렇게 받아들인 거예요. 정말 이 세상에서 보살필 수 없는 그런 사람을 보살피는 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 아닙니까. 마태복음 25장 31절에 하신 말씀을 요약해보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그 앞에 모으고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며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다 지옥에 갈 거다.’
‘주여, 왜 우리가 지옥에 가야 합니까?’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물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히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 돌보지 않았다.’
‘주여, 우리가 주가 언제 그런 적이 있는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였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교회에 얼마나 다녔냐, 헌금을 얼마나 했느냐, 기도를 얼마나 했느냐가 천국에 가는 기준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가 천국에 가는 기준이에요. 성경에 명확하게 나와있어요. 그런데 교회 다니면서 성경도 안 읽어 보잖아요. 예수님 말씀도 안 듣고 자기 복만 빈단 말이에요.

그런 가르침에 따라 닉 부이치치의 부모는 아이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여서 아이를 기쁜 마음으로 키운 거예요. 부모가 기쁘니까 아이가 기쁠 수밖에 없잖아요. 부모가 ‘아이고, 이걸 어쩌지’ 이러니까 아이가 심리적으로 열등의식을 갖지요. 모든 자녀들의 마음의 상처는 부모로부터, 특히 엄마로부터 오는 거예요. 집이 가난하다고 엄마가 가난에 대해서 열등의식을 가지면 애들은 가난에 열등의식을 갖고, 남편이 없다고 엄마가 늘 기죽어 있으면 애들은 아빠 없는 것에 열등의식을 갖는 거예요. 인간이란 게 별거 아니에요. 그냥 따라 배우는 거예요. 엄마가 한국말하면 한국말하고, 엄마가 김치 먹으면 애도 김치 먹고, 애를 미국에 갖다 놓으면 영어 배우고 버터 먹고 이래요. 아무 차이가 없어요. 원숭이 무리에 넣어 놓으면 원숭 이하고 똑같이 하는 거예요. 인간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특별히 한국인이라고 할 아무 특징이 없어요. 한국 프로그램을 깔면 그냥 한국인이에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일본에서 키우면, 일본 프로그램을 깔려서 그냥 일본 사람이 되는 거예요. 만주 지역에 다 우리 민족이 살았었잖아요. 고구려, 발해가 멸망한 뒤에 여진족으로 프로그램을 깔아버리니까 여진족이 되고, 몽골족으로 깔아버리니까 몽골족이 되고, 중국인으로 깔면 중국 사람이 되고 그렇습니다.

질문자가 벌써 아이에 대해 번민을 하고 열등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이는 필연적으로 열등의식을 갖습니다. 6살까지 벌써 그렇게 방황했다면 아이는 벌써 마음 밑바닥에 자기 존재에 대해 열등의식을 갖고 있어요.

오늘부터 생각을 확 바꿔서 아이를 늘 긍정적으로 봐야 해요. ‘장애가 있어도 좋다’ 이렇게 딱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상태가 조금 더 좋아지면 ‘부처님의 가피다’, ‘하느님의 보살핌이다’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이렇게 하면 신앙심도 깊어져요. 비장애인이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계속했는데도 장애 판정이 나면 ‘기도해 봐야 소용없다. 신이 있나 없나’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러면 신앙심도 허물어집니다. 질문자의 아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에 있다는 말은 장애가 약한 상태라는 거잖아요. 그러면 좋아해야 하는데, 정상인에 기준을 두니까 우려가 된다는 거예요. 질문자가 기준을 비장애인으로 두니까 마음이 힘든 것이지 아이의 장애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생각이 확 바뀌어야 돼요. 나중에 아이가 ‘내가 우리 부모님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라고 말할 정도의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들이 자식을 무슨 장신구처럼 밖에 가서 폼 잡는데 쓰려고 해요. ‘네 아들은 공부도 잘하네. 착하네 어쩌네’ 하는 소리 듣고 싶은 마음이 깔려있기 때문에 이런 번민이 생기는 거예요. 부모는 아이가 클 때까지 필요한 존재예요. 부모 자랑하라고 자식이 있는 게 아니고요. 아이가 자랄 때까지 도와주라고 있는 거예요. 스무 살 딱 넘으면 손을 떼줘야 돼요. 그 이상 붙들고 있으니까 과잉보호를 해서 지금 청년들이 문제잖아요. 그러니 기쁜 마음으로 키우시기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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