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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만한 글

팔목시계, 차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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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목시계, 차 보셨습니까?

 요즘 우리는 팔목시계 대신 손목시계를 사용한다. 최근에는 손목시계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용도라기보다는 일종의 장식품으로 더 많이 쓰인다. 스마트폰으로도 얼마든지 시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목시계라는 말이 폭넓게 쓰인 시점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림 1>을 보자.

▲ ‘손목시계’와 ‘팔목시계’의 연도별 사용 빈도(동아일보 말뭉치)

 <그림 1>을 보면 1990년대 이전에는 ‘손목시계’의 사용 빈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손목시계의 빈도가 급증한 것은 1989년 무렵이었을 뿐 그 이전에는(정확히는 1970년부터 1989년까지) 손목시계보다 ‘팔목시계’의 빈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팔목시계보다 손목시계를 더 자주 사용하게 되었을까?
 1988년에 문교부에서 고시한 「표준어 규정」은 팔목시계 대신 손목시계를 쓰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상하다. 1988년의 단수 표준어 규정 중 제25항에는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널리 쓰이면”이라는 판단 기준이 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동아일보 말뭉치에 나타난 사용 빈도만 놓고 본다면 이 규정이 잘못 적용된 것이다. 즉 손목시계보다 팔목시계가 압도적으로 사용되었으니까 ‘팔목시계’가 표준어가 되었어야 했다.
 단수 표준어의 선정이 철저히 빈도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면 ‘팔목시계’처럼 억울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이는 당시 표준어 선정 시점에서 정확한 빈도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80년대만 하더라도 말뭉치라는 개념도, 실제 구축된 말뭉치도 존재하기 않았기 때문에 어떤 단어의 빈도를 계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단수 표준어 규정 중 팔목시계와 손목시계 이외에 ‘팔뚝시계’가 존재했다는 점도 재미있다.

▲‘팔뚝시계’의 사용 시기 추정

 <그림 2>에서 보듯이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까지는 이상하게도 ‘손목시계’와 ‘팔목시계’의 빈도가 바닥을 치고 있다. 이 시기는 ‘팔뚝시계’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팔뚝시계가 1960년대에 등장했을 것임은 놀랍게도 전산학을 전공하는 고려대학교 이도길 교수가 알려 주었다).

 팔뚝시계는 1970년대 이후 손목시계와 팔목시계에 밀려 사용 빈도가 급격히 낮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1988년의 「표준어 규정」은 팔뚝시계만을 비표준어로 삼았어야 옳다.
 「표준어 규정」과 관련하여 2011년 새롭게 표준어의 지위를 얻은 ‘짜장면’이 떠오른다. 짜장면은 가장 많이 사용되면서도 정작 외래어 표기법 규정에 따라 표준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장면’만이 올바른 표기로 인정되어 왔다. 그래서 표준어 관련 문제에서 ‘자장면’과 ‘짜장면’은 많은 학생들을 괴롭히던 국어 문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외래어 표기법 규정보다 현실의 사용 양상을 중시하기 시작하면서 2011년 ‘짜장면’이 ‘자장면’과 더불어 복수 표준어로 인정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팔목시계는 더욱 억울할 수밖에 없다.
 봉지와 봉다리, 국수와 국시, 양상추와 양상치…….
 어느 하나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 전에 해당 단어가 언중에게 얼마나 많이, 폭넓게 사용되는지를 정확히 조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객관적이고 엄밀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시기를 아우르는 대규모의 말뭉치가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단어의 다양성은 언중의 사용 여부를 떠나 보존될 가치가 있다. 언어의 다양성이 소멸하는 곳에 민족의 다양성도 소멸한다는 무서운 말을 읽은 적이 있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언어만을 고집하는 것은 언어 다양성, 민족 다양성의 침해라는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또 다른 팔목시계를 만들지 않도록 언어정책은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할 것이다.

글: 김일환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팔목시계라는 말은 어디선가 들어 본 적도 있는 것 같은데

팔뚝시계라는 말은 상상도 못 해 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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